신미양요(辛未洋擾)의 전개와 영향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전개와 영향

1. 신미양요의 정의와 시대적 배경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고종 8년)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1866년(고종 3년)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해 아시아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침공한 군사적 충돌 사건을 지칭한다.1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서양 세력에 대한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이른바 쇄국(鎖國)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3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공(병인양요)을 격퇴한 경험은 이러한 대외적 저항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서양의 무력 침공에 대해서는 오직 무력으로만 대응한다는 국가적 방침이 확립된 시기였다.3

2. 발단: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은 5년 전인 1866년 8월(양력)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비롯되었다.1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이 거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일대에 진입하였다.4

조선 측의 거듭된 퇴거 요구에 불응한 셔먼호 승무원들은 수로 탐사를 강행하고, 조선 관리를 감금하며 민가에 행패를 부리는 등 무력 도발을 자행하였다.3 이에 격분한 평양 관민(官民)이 합심하여 화공(火攻)을 전개하였고, 배는 소각, 격침되었으며 승무원 전원이 사살되었다.4 이 사건은 미국이 5년 후 조선 원정을 감행하는 핵심적인 명분(Casus Belli)이 되었다.1

사건 발생과 군사적 보복 사이의 5년이라는 시차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을 종식하고 국내 재건(Reconstruction)에 집중하던 시기였으며, 아시아 함대를 동원한 원정 준비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반면 조선은 이 기간에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을 ’승리’로 규정하며 쇄국 정책의 유효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1871년의 미국 침공은 조선의 입장에서 이미 검증된 ’결사 항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 새로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미국의 원정 목적은 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이라는 처벌적 성격과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상업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1 처벌을 위한 함포와 협상을 위한 외교관을 동시에 파견하는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의 전형은, 조선의 입장에서 어떠한 외교적 신뢰도 구축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이었으며, 이는 조선이 모든 교섭을 거부하는 태도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3. 미국의 원정과 교섭 시도

미국의 원정은 외교관과 군인의 이원적 지휘 체계로 구성되었다. 주청(駐淸) 미국 공사 프레더릭 로우(Frederick F. Low)가 외교 교섭의 전권을 위임받았으며 6,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이 5척의 군함과 90문의 대포, 800명에서 1,230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5

이러한 이원적 지휘 체계는 원정의 목표 달성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로우 공사의 임무는 ’조약 체결’이었으나 7, 로저스 제독의 임무는 ’국기에 대한 모욕’을 ’응징’하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었다.5 미 함대는 강화 해협에 진입한 후 외교 문서를 전달하려 시도했으나, 조선은 이들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접촉을 일절 거부했다.7

미국 측이 해변에 장대를 세워 편지를 매달아 놓는 비공식적 방식, 이른바 ’장대 외교(杖帶外交)’를 시도했으나 9, 조선 정부는 “교섭할 여지가 없다“는 강경한 입장만 되풀이했다.7 외교적 수단이 소멸되자, 원정의 주도권은 외교관 로우에게서 군인 로저스에게로 즉각 넘어갔으며, ’협상’의 목적은 ’응징’으로 변질되었다.

4. 강화도 침공과 전투의 전개

4.1 1단계: 손돌목(孫乭項) 포격 사건 (1871년 6월 1일)

교섭이 결렬되자, 미 함대는 1871년 6월 1일 강화 해협의 수심 측량을 명분으로 조선의 핵심 방어 수역인 손돌목을 불법적으로 침입하였다.9 조선 수비대가 경고 포격을 가하자, 미 함대는 즉각 압도적인 화력으로 응사하여 조선군 포대를 무력화시켰다.9 이 사건은 로저스 제독에게 ’조선군의 선제공격’이라는 침공의 최종 명분을 제공하였다.1

4.2 2단계: 초지진(草芝鎭)·덕진진(德津鎭) 함락 (6월 10일)

손돌목 포격 9일 후인 6월 10일, 미군은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했다.5 미 해병대와 수병 650여 명이 신형 함포의 지원 사격하에 초지진에 상륙했다.9 초지진과 덕진진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화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차례로 함락되었다.5 미군은 점령지의 무기고와 군사 시설을 모조리 파괴하고, 조선군 대포를 파괴하거나 강화 해협으로 굴려 버리는 등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9

5. 군사력과 화력의 격차

신미양요의 전투 결과는 전술이나 용기의 차이가 아닌, 19세기 중반 산업혁명기 군사 기술과 중세적 군사 기술의 일방적인 충돌이었다.

미군은 남북전쟁을 통해 검증된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9 함포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발탄(Explosive Shells)’을 사용했으며, 개인 화기는 스프링필드(Springfield)나 레밍턴(Remington) 같은 후장식(後裝式) 소총과 연발 권총이었다.9

반면, 조선의 주력 화기인 화승총(火繩銃)은 사거리, 발사 속도, 정확도 모든 면에서 미군의 소총과 비교가 불가능했다.9 조선의 대포(홍이포, 불랑기포 등)는 단순한 쇠뭉치(포환, 砲丸)를 발사하는 전장식(前裝式) 화포였으며, 포대 주변에 축조된 포안(砲眼)에 포구를 고정시켜야 해 사계(射界)가 극히 제한되는 결점을 지녔다.8 미군의 함포 포격은 조선군 포진지를 ’삽시간에 파괴’하였다.9

표 1: 신미양요 양국 군사력 및 화력 비교

구분미국 (USA)조선 (Joseon)자료 출처
총병력약 800명 ~ 1,230명약 500명 (광성보 주둔군)[8, 10, 11]
함선5척 (기함: 콜로라도호 등 프리깃 전함)없음 (해안 포대만 존재)8
대포90문 (남북전쟁 거친 신형 함포)143문 (광성보 재배치 기준)[8, 12]
포탄폭발탄 (Explosive Shells)쇠뭉치 포환 (Solid Cannonballs)9
개인화기후장식 소총 (레밍턴, 스프링필드), 연발 권총화승총 (Matchlock Muskets)9
기술 수준19세기 산업혁명기 근대식 무장17세기 수준의 재래식 무장9

6. 최대 격전: 광성보(廣城堡) 전투 (6월 11일)

6.1 지휘관 어재연(魚在淵)의 방어 태세

1871년 6월 11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시킨 미군은 조선군 최후의 보루인 광성보로 향했다.5 광성보 수비는 손돌목 포격 직후 급파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11 그는 1,000여 명의 병력을 수습하고 143문의 대포를 재배치하여 항전 태세를 강화했다.12 어재연은 장군의 지휘를 상징하는 ’수자기(帥字旗)’를 높이 게양하고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졌다.11

6.2 백병전(白兵戰)의 전개와 장렬한 순국

미군은 함포와 야포로 광성보가 초토화될 때까지 포격을 가한 후, 상륙 부대가 돌격을 개시했다.11 압도적인 포격으로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살아남은 조선군은 진지로 돌입한 미군을 상대로 처절한 백병전(白兵戰)을 전개했다.10

포탄이 떨어진 조선군은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0 어재연 장군은 칼을 잡고 적을 무찌르다 장렬히 전사했으며,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 순국했다고 기록된다.11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도 이 전투에서 함께 순국했다.12

조선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는 등8,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10

7. 사상자 규모와 통계의 불일치

7.1 미군의 피해

압도적인 화력 우위 덕분에 미군의 피해는 극히 경미했다. 광성보 전투를 포함한 전 과정에서 장교 1명, 사병 2명 등 총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8

7.2 조선군 피해와 기록의 차이

조선군의 사상자 통계는 미국 측 기록과 조선 측 공식 기록 간에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표 2: 신미양요 조선군 사상자 통계 비교

기록 출처전사 (Killed)부상 (Wounded)포로 (Captured)비고 (Notes)자료 출처
미국측 기록약 350명-20명약 100명은 전투 후 자살자로 추정. 8 민간인 피해 포함 가능성. 148
조선측 공식 기록 (<고종실록>)53명24명-어재연/어재순 등 5명 외 시신 훼손 극심. 14 51명은 7개 분묘에 합장. 148

이러한 통계의 차이는 단순한 왜곡이나 축소라기보다, 양국의 ‘사상자’ 집계 기준과 목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측의 ’약 350명 전사’는 미군이 전장에서 확인한 적군의 총 사망자 수(Body Count)로, 정규군 외에 호랑이 포수 등 비정규군, 전투 보조 인력, 그리고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한 인원(약 100명)까지 모두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8

반면, <고종실록>의 ’53명 전사’는 조정에 공식 보고된 ’군적(軍籍)에 등록된 정규군의 손실’일 가능성이 크다. 어재연, 어재순 등 5인을 제외한 나머지 시신은 신원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14, 전사자 51명을 7개의 분묘에 합장(신미순의총)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14 따라서 조선군의 실제 총인명 피해는 미국 측 기록에 더 근접할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14

8. 상징적 전리품: ’수자기(帥字旗)’의 운명

8.1 약탈의 과정과 상징성

광성보 전투 종료 후,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기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Spoil of War)으로 노획했다.5 가로세로 약 4.5m 크기의 이 깃발은 장수(帥)를 상징하는 대형 군기(軍旗)로, 조선군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이 되었다.15 미군은 이 깃발을 미국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가져가 130년 넘게 보관했다.5

8.2 2007년 ’장기 대여’의 합의

한국 정부와 민간의 지속적인 반환 요구 끝에, 2007년 10월 ’영구 반환’이 아닌 ‘장기 대여’ 형식으로 국내에 돌아왔다.15 합의 조건은 “최초 2년 대여 후, 매 2년씩 연장하여 최장 10년까지” 국내에 보관 및 전시한다는 것이었다.15

8.3 2024년 반납과 2025년 반환 운동의 재개

수자기 문제는 1871년의 종결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외교적, 문화재적 현안이다. 2007년의 ‘최장 10년’ 대여 합의는 시한부였으며, 대여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수자기는 2024년 3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5

이 ‘반납’ 사실은 1871년의 약탈 상황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2025년 10월 강화도를 중심으로 ’수자기 반환운동 추진위원회’가 새로 발족하는 등 영구 반환을 촉구하는 운동이 재개되었다.16

근본적인 쟁점은 법적 해석의 차이에 있다. 한국은 ’약탈 문화재’로 규정하지만, 미국은 ’전시(戰時) 국제법상 합법적 노획물(전리품)’로 간주한다.16 미국 관련 법령상 ’전리품’의 영구 반환은 미 의회와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한 복잡한 사안이므로 15, 이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외교적 과제로 남아있다.

9. 결론: 신미양요의 결과와 역사적 영향

9.1 미군의 철수와 조선의 ‘정치적 승리’

미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군 주력 부대를 격멸하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10 그러나 조선 정부가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의지를 보이자 5, 조선의 개항이라는 ‘외교적·정치적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더 이상의 군사 작전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미 함대는 1871년 7월 3일 자진 철수하였다.5

조선은 이 사건을 병인양요에 이어 서양 열강을 ‘물리친’ 사건, 즉 ’정치적 승리’로 규정했다.17

9.2 척화비(斥和碑) 건립과 쇄국 정책의 공고화

미군을 격퇴(라고 인식한)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확고히 했다.18 그는 서양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것을 ’매국(賣國)’으로 규정하고, 쇄국 의지를 전국적으로 천명하기 위해 1871년 신미양요 직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도록 명했다.3

척화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19:

  • 원문(漢):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 해석: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이 비문에는 丙寅作 辛未立 (병인작 신미립), 즉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운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19 이는 척화비 건립의 결정적 계기가 신미양요였음을 증명한다. 1866년(병인양요, 셔먼호 사건)에 쇄국의 ’결의’를 다졌다면, 1871년 미국마저 물리쳤다고 판단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이 결의를 ’전국적인 석비’로 공포할 수 있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신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신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킨 분수령이었다.

9.3 역사적 평가: 저항과 고립의 양면성

신미양요는 열세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무력 침공에 맞서 싸운 ’자주적 성격’의 저항으로 높이 평가된다.3 어재연과 조선군의 장렬한 항전은 훗날 항일의병운동 등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5

그러나 이 ’승리’의 경험은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 정세의 변화를 외면하고 문호 개방을 더욱 늦추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3 쇄국 정책의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결국 4년 뒤인 1875년, 더 치밀하게 준비된 일본의 포함외교(운요호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 1876)을 체결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0.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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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국가유산청 > 보도/설명 상세 >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기」 장기대여 …, https://www.khs.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jsessionid=mqLhBWCgxOBscrG9dLiAsjovDdjg0bXx6zEDZWC4A1UJhxAJMzMcbZs5ZMpOxTGz.new-was_servlet_engine1?newsItemId=155244803§ionId=b_sec_1&pageIndex=512&mn=NS_01_02&strWhere=&strValue=&sdate=&edate=
  16. 신미양요 약탈 ‘어재연 수자기’, 강화에서 반환 운동 시동 건다 - 경인일보, https://www.kyeongin.com/article/1754175
  17. 신미양요 (r302 판)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B%A0%EB%AF%B8%EC%96%91%EC%9A%94?rev=302
  18. 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38번 해설 : 신미양요(1871): 조선-미국 간의 전투 - Daum 카페, https://m.cafe.daum.net/his100/9Ya7/13?svc=cafeapi
  19. 척화비(斥和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753